1978년 12월 이란에서는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원리주의로 무장한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가 새로운 공화국 정부를 수립하는 이란 혁명이 발생했다. 이어 소련이 이란 혁명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이웃 국가 아프가니스탄의 친소 정권을 지원하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까지 발발하자 1979년 제2차 석유 파동이 발생했다. 혁명이 발생하자 이란 내 원유 생산량은 당초 1/3 수준으로 내려갔는데 전쟁까지 연이어 터지자 유가는 엄청나게 급등하기 시작했다.
1979년 3월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은 직후 이란 내 원유 생산을 늘렸고 북해와 멕시코만 등에서 발견된 유전을 통해 원유 공급량이 회복되며 석유 가격이 안정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산유국들이 원유 가격을 상승한 가격 그대로 고시하면서 가격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전세계적으로 물가가 상승하고 실업을 비롯한 각종 경제 문제가 심각해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그러자 미국은 금리를 21%까지 인상하며 급속히 불어난 달러를 미국 은행으로 회수하고자 했다. 곧이어 많은 외채를 들여와 산업화를 진행하던 개발도상국들은 부채가 폭발적으로 급격히 증가하여 경제가 크게 휘청거렸다. 이 시기 미국의 고금리 정책은 1981년 2차 석유 파동이 끝난 뒤에도 이어져 1980년대 중남미와 동유럽 외채 위기의 원인으로 꼽힌다.
1981년을 기점으로 해서 원유값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멕시코의 경상수지 적자는 무섭게 불어났다. 그런데 당시 세계 경제는 미국 주도의 고금리 시장이었기 때문에 멕시코는 더 이상 이자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런 배경으로 멕시코 정부는 1982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였다. 멕시코의 총 GDP는 2,640억 달러(1981)에서 1,475억 달러(1987)로, 1인당 GDP는 3,813달러(1981)에서 1,765달러(1986)로 5년 만에 반토막이 났다. 1986년에는 성공적인 산업화로 '한강의 기적'을 일궜다고 평가받던 한국에게 1인당 GDP를 추월당하고 말았다.
1982년 외채 위기 이후 멕시코 정부는 물가상승을 우려해서 임금 인상을 억제했고 노동 시장 규제 완화 등의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외국 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었다. 이를 통해 많은 외국 기업들이 멕시코에 진출하거나 적극적으로 투자를 진행했지만 이러한 움직임들이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나름의 성과가 있었으나 그 이득은 부유층에게만 온전히 집중되었고 빠르게 증가하는 빈곤율은 줄어들 조짐이 없었다. 이때부터 현재까지 40여 년간 멕시코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좀처럼 상승할 기미가 없는 임금 정체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멕시코는 석유만 믿고 너무나 많은 외채를 끌어왔었는데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멕시코의 '브랜드'나 '석유 외 다른 카드'가 전무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당시 60여 년 가까이 집권하고 있던 제도혁명당(PRI)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급속하게 커졌다.
여러 위기 속에서도 1988년 당선된 제도혁명당(PRI)의 살리나스(Carlos Salinas de Gortari) 대통령은 경제 자유화를 중심으로 한 각종 정책들을 펼쳐 나갔다. 특히 살리나스는 후보 시절부터 NAFTA (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 체결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인물이다. 수많은 국영 기업들을 민영화했는데 이 시기 성장한 대표적인 기업인이 바로 이전 포스팅에서 다루었던 통신 재벌 카를로스 슬림(Carlos Slim)이다. 대표적인 정경유착 사례이자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 진행되었던 최악의 민영화와 거의 복사 붙이기 수준으로 비슷했다. 어쨌든 한동안 조금씩 외채가 줄어들고 해외 금융 자본 유입으로 경제가 회복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경상수지 적자가 급속히 늘어나고 환율 관리에 실패하면서 1994년 다시 한번 경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멕시코의 경제 성장은 다시 수포로 돌아간다. 당시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 중 하나로 NATFA를 체결했는데, 멕시코 경제 위기가 자국에 미칠 영향(테킬라 효과)을 우려한 미국이 멕시코를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조치도 뒤따랐다. IMF 관리 체제 하에 멕시코에는 경제 자유화 조치가 가해지며 일부 경제가 회복하는 듯했지만 1997년 발생한 아시아경제 위기로 기세가 꺾일 수 밖에 없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줄곧 진행된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들과 무역시장 개방, 특히 NAFTA로 인해 멕시코 농촌 지역은 직접적인 타격을 입으면서 도시-농촌, 지역 간 극심한 빈부 격차 문제가 고착화되었다. 미국의 우람한 식량 기업들 앞에서 자영농이 대부분인 멕시코 농업은 말 그대로 붕괴했다. 한-미 FTA 체결에 앞서 쌀 시장 개방 문제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격한 논쟁이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 탄탄하지도 않았던 제조업은 미국 기업의 하청으로 전락하였고 그로 인해 생긴 실업자들과 빈곤층들은 먹고 살기 위해 마약 카르텔에 편입되었다.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들이 멕시코 국가 전체를 위협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부터였으며 그 배경에는 실패한 경제 정책이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경제가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고 국가의 주요 기간산업 기틀이 미약하며 '공정한 룰에 기반한 건강한 경쟁 체제'가 전무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경제 자유화' 조치가 독이 되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역사적인 전통(?)이 있는 빈부 격차는 20세기 중반 조금 나아지는가 싶더니 세계 그 어떤 중진국들보다 심각한 수준이 되었고 이로 인해 파생된 세계적 규모의 마약 카르텔들은 국민 전체의 안전을 위협하고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1억 명이 넘는 많은 인구, 풍요로운 자원 (특히 석유)과 넓은 국토를 가지고도 이것밖에 못한다는 자책과 자학을 멕시코인들 스스로도 자주 하곤 한다. (한편으론 자부심, 다른 한편으로는 자포자기라는 양극의 감정이 공존한다) 멕시코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속속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바로 위에 있는 미국과 비교하며 왜 멕시코는 이렇게 발전을 못하냐는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멕시코는 브라질, 인도, 러시아 등과 함께 정치, 사회적 발전과 제도의 성숙 정도가 경제 성장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멕시코는 한 나라의 성장 잠재력이 사회적, 제도적 불안정성을 충분히 커버한다고 여기던 케이스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정 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룩한 나라가 민주적, 제도적 진보를 이루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성장이 불가능한 경우가 무수히 많았다. (한국은 그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고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사실상 마지막 국가다)
처음 멕시코를 갔었던 교환 학생 시절, 멕시코 내에서도 상당히 풍요롭고 잘 사는 곳으로 손꼽히는 과달라하라, 그중에서도 주로 중산층과 부유층이 많이 거주하는 사포판(Zapopan) 지역에 있을 때였다. 평화로운 동네에서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건넸던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멕시코는 모든 성장이 1980년대에 멈춰있는 곳이라고. 지금 보고 있는 이 풍경이 1980년대와 다르지 않은데, 지금의 시각이 아니라 약 25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면 상당히 부유한, 많이 발전한 사회로 보이겠지만 안타까운 건 거기까지였다는 말이었다. 그 당시에는 정말 뭘 몰랐기 때문에 "그렇구나~"로 넘어갔는데 이제는 그 말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멕시코인들의 그 모든 노력과 과실은 40여 년 전에 머물러 있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퇴보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는데, 1981년 최저 임금이 2010년 대의 최저 임금의 2배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마약 카르텔은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너무나 큰 거대 조직이 되어 버려 마땅한 대책도 없는 상황이다. 어쩌면 여기에서 더 상황이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4차 산업 혁명이란 단어가 이제는 일상 속으로 들어왔고 최첨단 기술 경쟁이 치열해지는 세계 경제 속에서 멕시코가 설 자리는 어디일까?
▷멕시코 경제 포스팅 1편 바로보기 :
5. 멕시코 경제 - 멕시코 혁명, 수입대체산업화, 석유
2024년 IMF 통계치에 따르면 멕시코 국민 1인당 GDP는 15,072달러(188개국 중 64위)를 기록해서 브라질, 중국, 러시아와 세계 평균 (13,870달러)를 능가했다. 대략 터키와 비슷한 수준의 중진국인데 국가
charlaconlucy.tistory.com
▷카를로스 슬림 포스팅 바로보기 :
멕시코의 통신 재벌, 카를로스 슬림 (Carlos Slim Helú)
멕시코 최대 부호 한때 세계 부호 순위 1,2위를 다투던 멕시코의 통신 재벌, 2024년 현재 포브스(Forbes)지가 선정한 세계 부호 14위에 랭크된 이 인물의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본 사람들이 있을 것 같
charlaconlucy.tistory.com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멕시코의 아이콘 - 2 (0) | 2024.03.26 |
---|---|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멕시코의 아이콘 - 1 (2) | 2024.03.22 |
5. 멕시코 경제 - 멕시코 혁명, 수입대체산업화, 석유 (0) | 2024.03.13 |
4. 멕시코 정치 - 대통령 중심제, 연방제, 제도혁명당(PRI) (2) | 2024.03.07 |
세계 여자 골프의 아름다운 전설, 로레나 오초아 (Lorena Ochoa) (0) | 2024.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