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한 번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이름, 프리다 칼로(Frida Kahlo). 초현실주의 멕시코 화가이자 페미니즘의 아이콘이며 영화 같은 기구한 삶을 그림으로 승화시켜 생전에도 사후에도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02년 프리다 칼로의 인생을 다룬 영화가 평단의 인정과 인기를 동시에 얻으며 세계적으로 더 알려지며 멕시코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다.
프리다 칼로는 1907년 7월 6일에 멕시코시티(Ciudad de México)의 코요아칸(Coyoacá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계 멕시코인 기예르모 칼로(Guillermo Kahlo), 어머니는 마틸데 칼데론(Matilde Calderón)이다. 본명은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칼데론(Magdalena Carmen Frida Kahlo Calderón)으로 아버지가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하는 프리다(Frida)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프리다 출생 직후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원주민 유모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고 한다. 이는 추후 프리다가 멕시코 민족주의(Nationalism)와 전통에 큰 영향을 주는 요소 중 하나가 되었고 그녀의 작품 <유모와 나>(1937)에서 잘 나타난다.
아버지 기예르모는 사진사였는데 어린 프리다를 매우 아껴 철학, 고고학, 미술학, 음악 등 다양한 예술을 접할 수 있게 북돋아주었고 특히 본인이 사진 작업을 할 때에도 곁에서 지켜보게 했다. 이런 경험은 프리다가 나중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세밀한 초상화를 표현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15살이 된 1922년, 당시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이자 멕시코 혁명의 열기를 온전히 품고 있던 국립고등학교(Escuela Nacional Preparatoria)에 진학하였다. 원래는 남학생들만 진학할 수 있었지만 진보적인 교육부 장관이었던 호세 바스콘셀로스(José Vasconselos)의 정책 덕에 그 해 여학생 입학이 처음으로 허용되었다. 당시 전교생 2,000명 중 여학생은 프리다를 포함하여 35명이었다. 당시 남자들만 교육을 시키는 남성우월주의(Machismo) 풍조가 강했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이 있었기에 프리다는 명석한 두뇌와 재능을 마음껏 키울 수 있었다. 프리다 인생 전체를 볼 때 유년기 시절 가족들 간 끈끈한 관계와 부모님께 받은 사랑은 칼로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금 나중의 이야기지만 그녀가 인생에서 많은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며 큰 고통에 시달릴 때에도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던 것은 어린 시절 받은 사랑과 그 덕분에 만들어진 단단한 자아 때문이 아니었을까.
프리다는 6살 때 척추성 소아마비로 약 9개월 간 집에서만 지내야 했다. 가늘어진 오른쪽 다리를 가리기 위해 긴치마를 입고 양말을 여러 켤레 신고 오른쪽 신발은 구두 굽도 높은 걸 골랐다고 한다.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자 재활 훈련의 일환으로 자전거, 롤러스케이트, 수영, 복싱, 레슬링 등 다양한 운동을 섭렵했다. 갑작스럽게 불편해진 몸으로 또래보다 일찍 성숙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내면에는 우울함도 생겨났다. 다만 겉으로 보이는 프리다는 '여걸' 그 자체로 거침없고 당당하며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국립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정치적이면서도 사회 부조리에 저항하고 낭만적 사회주의(혹은 아나키즘)을 신봉하는 'Los Cachuchas(로스 카츄차스)'라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이 동아리는 7명의 남학생과 프리다를 포함한 2명의 여학생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훗날 멕시코를 대표하는 정치인, 지식인, 예술인 등이 되었다. 이들은 학교 내 개혁을 선동하고 상식을 뛰어넘는 갖가지 돌발행동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한창 꽃같이 아름다운 18살,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바뀌게 하고 나중에는 큰 상실감을 가져다준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1925년 9월 17일, 당시 남자친구였던 알레한드로 (Alejandro Gómez Arias)와 함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며 벽에 부딪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짓눌리는 큰 사고가 발생했고 프리다는 매우 심각한 상태로 병원에 이송되었다. 당시 부러진 철근이 프리다의 허리를 관통하여 척추뼈 3군데 골절도 모자라 갈비뼈 2군데, 쇄골뼈, 골반뼈 3군데 골절에다가 안 그래도 불편했던 오른쪽 다리 11군데 골절에 오른발이 탈구되는 몹시 위중한 상태였다. 이 사고로 그녀는 평생에 걸쳐 35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하반신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자궁의 기능이 현저히 저하되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큰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 고통스러운 경험이 사고 이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림과 예술의 세계로 눈을 돌리게 했다. 프리다는 자신의 모든 아픔과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 계속)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멕시코의 아이콘 - 3 (4) | 2024.0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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