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bre 메히꼬, México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멕시코의 아이콘 - 3

루시초이 2024. 3. 29. 15:04

디에고 리베라의 영향

리베라와 결혼하기 몇 년 전부터 프리다 칼로는 주로 자화상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려왔다. 리베라와 결혼 이후에는 그로부터 받은 '멕시코 국민주의'(El mexicanismo, el nacionalismo)가 그녀의 작품에서 서서히 눈에 띄기 시작한다. 리베라는 멕시코 문화, 특히 스페인 정복 이전의 문화(la cultura prehispánica)에 무척 애정을 가지고 이러한 요소들을 자신의 벽화에 그려 넣었다. 덕분에 그는 당시 멕시코 혁명으로 단합된 국가 정체성과 새로운 시스템을 마련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멕시코 정부가 추진하는 벽화 운동의 주요 수행 인물로 선정될 수 있었다. 이에 그림에 자신의 생각과 삶을 표현하던 프리다 칼로가 남편의 영향을 받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멕시코 전통 문화에 대한 애호감이 리베라를 통해 본격적으로 발현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프리다 칼로에게 있어 리베라는 예술과 정치 활동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고 또 그런 부분에서 두 사람의 시너지는 분명 긍정적이었다. (그런 점이 프리다 칼로가 리베라에게 떨칠 수 없는 애증을 가지게 된 이유가 아닐까?)
 

미국 생활

멕시코와 미국 국경선 위에서 있는 자화상(Autorretrato en la frontera entre Mexico y los EE.UU), 1932
멕시코와 미국 국경선 위에서 있는 자화상(Autorretrato en la frontera entre Mexico y los EE.UU), 1932

 
1931년~1934년 프리다 칼로는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따라서 미국 디트로이트, 뉴욕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들 부부가 미국으로 가게 된 배경에는 당시 급변하던 멕시코 국내 정치 환경이 크게 작용했다. 멕시코 공산당에 가입해서 활동할 만큼 좌파 성향을 지녔던 이들에게 카예스(Plutarco Elías Calles) 전임 대통령의 우경화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호세 바스콘세로스 (José Vasconcelos)가 추진한 벽화 운동을 실현하는데 가장 중심이 된 인물이 디에고 리베라였으나 이 벽화 운동은 1930년대 들어와 중단되었다. 다행히 이 시기 미국에서 리베라의 명성이 자자했기에 미국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리고 여러 작업을 의뢰 받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디트로이트 미술관 로비에 그린 <디트로이트 산업 벽화>(Murales de la Industria de Detroit)다. 남편을 따라 디트로이트에서 지내는 시기 프리다도 <디트로이트 거리의 윈도 디스플레이>(Vidriera en una calle de Detroit), <멕시코와 미국 국경선 위에서 있는 자화상>(Autorretrato en la frontera entre México y los EE.UU), <헨리 포드 병원>(Henry Ford Hospital) 등의 작품을 그려냈다. 다만 이 시기 프리다 칼로는 한 명의 예술가로서 인정받기보다는 '유명한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로 평가받고 그 타이틀이 우선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녀의 작품은 좀 더 시간이 흘러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초현실주의 화가로 알려지다

1938년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거장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ón)이 멕시코에 망명하여 거주 중이던 레온 트로츠키를 만나러 멕시코로 왔다. 이때 브르통은 프리다 칼로를 만나 친분을 쌓게 되었고 그는 그녀의 작품을 '초현실주의'로 평가하였다. 이에 대해 그녀가 했던 유명한 말은

내가 초현실주의 작품을 그린다고 다들 믿었지만 난 그랬던 적이 없다.
난 내 꿈을 그린 적이 없다. 내 자신의 현실을 그렸다


1939년에는 브르통을 통해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게 되었고 이곳에서 스페인 말라가 출신의 세계적인 초현실주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를 알게 되었다. 프리다 칼로는 뛰어난 재능과 감각적, 독창적인 화풍을 지닌 멕시코의 뛰어난 예술가로서 점차 명성을 얻어가고 있었다.
 

디에고 리베라와 재결합

1942-45년 사이에 푸른집(Casa Azul)에서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1942-45년 사이에 푸른집(Casa Azul)에서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1939년은 프리다가 리베라와 이혼하고 몹시 우울하고 힘들어했던 시기였고 그다음 해 1940년도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는 복잡한 이들이 많이 일어난 때였다. 5월 24일 트로츠키 1차 암살 시도가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프리다가 멕시코로 돌아와 거주하고 있던 푸른 집(Casa Azul)에 대해서도 가택 수색이 이루어지며 몇 시간 구금되기도 했다. 결국 그 해 8월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트로츠키가 살해당하면서 다시 한번 경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 시기 프리다는 1925년 사고 여파로 계속 좋지 않았던 척추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 샌 프란시스코로 향했는데 당시 리베라도 이곳에서 여행 중이었다. 이로부터 몇 달 후, 둘은 이혼하고 약 1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재결합을 하게 되었는데,  '함께 살고 지출도 분담하며 예술 활동도 협력하지만 성적 관계는 맺지 않는다'는 조건에 합의를 하고 이루어진 재혼이었다. 
 

 '프리다 칼로' 자체로 인정받다

예술가로서 그녀의 명성은 점점 퍼져나갔고 특히 미국에서 더욱 그러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 보스턴 현대미술관(The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의 중요 전시회에 참가하였으며 1943년에는 페기 구겐하임 (Peggy Guggenheim)이 연 전시회 '여성작가 31인'(The Exhibition by 31 women)에 초청되었다. 그 해부터는 멕시코 시티에 있는 멕시코 최고의 예술 교육 기관인 에스메랄다 학교(Escuela Nacional de Pintura, Escultura y Grabado, E.N.P.E.G.)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1953년 멕시코 시티에서 그녀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개인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마지막까지 그녀를 괴롭힌 건강 문제

프리다 칼로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건강도 악화되었다. 개인 전시회가 열린 시기에는 의사가 전시회 참가를 금지할 정도로 좋지 않았지만 프리다 칼로는 병원 침상에 누운 채로 전시회 개막일에 참석하여 많은 이들과 시끌벅적하게 즐기고 마셨다. 하지만 얼마 뒤 괴저로 인해 무릎 아래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일은 프리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할 정도로 깊은 우울감을 안겨주었으며 실제로 그녀는 처방받은 (아편성) 진통제를 통해 몇 번 시도하기도 했다. 이 시기 프리다 칼로는 일기장에 시를 적기 시작했는데 주로 고통과 아픔에 관한 것이었으며 1954년 2월에는 극단적인 선택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기록했다.
 

마지막을 함께한 리베라

푸른집(Casa Azul)&#44; 현재는 프리다 칼로 박물관
푸른집(Casa Azul), 현재는 프리다 칼로 박물관

 
다리 절단 이후 약 6개월 간 그녀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문에 가까운 고통을 느끼며 삶을 스스로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마지막까지 그녀를 붙잡아준 건 디에고 리베라였다. 이는 리베라는 자신이 없으면 안 된다고 믿었던 일종의 '자만'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녀 생의 마지막까지 용기를 북돋아주고 휠체어를 밀어주며 함께한 건 리베라였다. 그녀는 과테말라 내정에 미국이 간섭하며 카를로스 아르마스의 쿠데타를 지원하는 행보에 반대하는 시위에 리베라와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폐경색으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프리다 칼로는 그녀가 태어나고 쭉 살아왔던 푸른 집(Casa Azul)에서 1954년 6월 13일 숨을 거두었다. 푸른 집(Casa Azul)은 현재 프리다 칼로 박물관(el Museo Frida Kahlo)으로 변모하여 그녀의 다양한 작품과 생애, 그리고 그녀가 일기장에 남긴 마지막 문구를 보여주고 있다.

이 외출이 즐겁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길.
Espero alegre la salida y espero no volver jamás

 

"1929-1954년 프리다와 디에고가 이 집에서 살았다"

 
▷프리다 칼로 이전 포스팅 보러가기 :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멕시코의 아이콘 - 1

멕시코의 아이콘 멕시코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한 번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이름, 프리다 칼로(Frida Kahlo). 초현실주의 멕시코 화가이자 페미니즘의 아이콘이며 영화 같은 기구한 삶을 그림으로

charlaconlucy.tistory.com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멕시코의 아이콘 - 2

(1편에 이어) 그림과 프리다 칼로 사고 이전, 소아마비로 불편한 몸을 이겨내기 위해 프리다 칼로는 활동적으로 많이 움직이고 뛰고 여러 운동을 즐겼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불편한 다리를 잊게

charlaconlucy.tistory.com